재일조선인의 부재와 존재: 『유희』가 전하는 정체성의 고뇌와 공감
이양지의 소설 『유희』를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다가왔던 감정은 ‘부재’와 ‘존재’의 긴장감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타자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선을 끊임없이 되묻게 만든다. 유희라는 인물이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며 겪는 고뇌는 그 자체로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유희의 부재로부터 시작된 깨달음
부재 속에서 존재를 느끼다
소설은 유희가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전화를 받으며 시작된다. 이 순간, 화자인 ‘나’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가 집에 없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그동안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흩어지는 듯한 상실감이 짙게 묻어난다. 유희의 부재는 오히려 그녀의 존재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녀가 남긴 흔적들은 단순히 물리적인 사물이 아니라, 관계와 기억의 집합체로 작용하며 ‘나’를 끊임없이 과거로 돌려보낸다.
이 대목에서 문득, 나 스스로도 떠올리게 되는 관계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을 때보다 떠난 후에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그들의 말투, 행동, 그리고 그들이 남긴 작은 물건들조차도 그들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유희의 책상과 노트는 단순히 그녀의 물건이 아니라 그녀가 느꼈던 정체성과 갈등을 마주하는 상징물이었다.
읽을 수 없는 글자, 그러나 남겨진 목소리
유희가 떠나면서 남긴 448장의 일본어 노트는 화자인 ‘나’에게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이 글자들은 ‘나’에게 읽히지 않는 언어로 남아 있지만, 동시에 유희의 숨결과 목소리를 전달하는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다. 흥미로웠던 점은, ‘나’는 이 글자들을 굳이 해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글자의 모양과 질감을 통해 유희를 느끼고, 그녀의 감정과 내면을 추측해 간다. 이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교감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읽을 수 없는 글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관계란 종종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상대를 느끼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유희의 노트는 나에게도 일종의 거울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들의 흔적을 통해 공감하고자 애쓴다.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다가오며, 유희의 복잡했던 내면을 투영하는 장치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노트는 단순한 기록물이 아닌 유희 자신이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
재일조선인과 한국어의 거리감
유희가 겪는 가장 큰 갈등 중 하나는 언어와 정체성 사이의 괴리다. 그녀는 한국어를 모어(母語)가 아닌 모국어(母國語)로 학습해야 한다. 그녀에게 한국어는 자연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체득해야 하는 ‘외국어’와 같은 존재다. 이 과정에서 유희는 "우리나라"라는 말을 쓸 수 없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위선자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유희의 고통이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소속감을 찾지 못한 데서 오는 깊은 외로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작품 속 유희의 표현 중 "대금 소리는 우리말입니다"라는 대사가 특히 인상 깊었다. 그녀에게 한국어는 소리로 다가오지 않고, 그녀가 상상한 대금 소리 같은 울림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의 한국어는 시끄럽고 숨 막히는 최루탄처럼 그녀를 압도한다. 한국인인 ‘나’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우리나라’라는 표현이 유희에게는 얼마나 먼 단어였을까. 그녀의 경험은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언어와 정체성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집, 그리고 작은 공동체
유희는 한국 전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지만, 숙모와 ‘나’가 있는 하숙집을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다. "이 나라가 아니라, 이 집에 있었던 거예요"라는 유희의 고백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그녀가 모국에서 느낀 정체성과 문화적 압박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던 작은 공동체를 상징한다. 그녀가 이 집에서 느낀 온기는 나에게도 울림을 주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거대한 집단에 속하기 전에, 작은 관계와 공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위로받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숙모라는 인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숙모는 유희를 한국에 억지로 적응시키려 하기보다, 그녀가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그녀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반면, ‘나’는 유희에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강요하며 그녀를 자신의 기대에 맞추려 했다. 숙모와 ‘나’의 대조는,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한다.
타자를 이해하는 새로운 가능성
부재를 통해 배운 관계의 본질
『유희』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유희가 남긴 흔적을 통해 그녀를 다시 마주한다. 유희의 이름은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고유명사로 불리는 이름이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넘어,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태도에 대해 묻는다.
나는 이 작품이 ‘부재’를 통해 ‘존재’를 새롭게 정의한다는 점에서 매우 깊은 울림을 받았다. 유희가 떠난 후에야 그녀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한 ‘나’처럼, 우리도 때로는 부재를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순히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는 관계와 순간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다시 살아나는 이름, 유희
『유희』는 단순히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타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유희라는 이름이 남긴 울림은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그녀의 부재가 곧 그녀의 존재를 드러내듯, 우리도 때로는 누군가의 부재를 통해 그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유희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은, 우리 모두가 관계와 공감을 통해 인간으로서 더 나은 존재가 될 가능성을 열어둔다.